본문 바로가기

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18세기 복식2(로코코 스타일)

18세기 남자 복식

18세기 남자의 기본 복식은 17세기에 확립된 코트, 웨이스트 코트, 셔츠, 바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세기의 진행에 따라 재단 방법과 실루엣의 변화가 있었다.

일상복과 특별한 경우에 입는 의식복은 품목이나 형태에는 별 차이가 없고 사용한 직물에 따라 실크나 브로케이드로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자수, 기타 장식을 한 것은 의식복으로, 실용적인 직물로 만든 것은 일상복으로 입었다.

 

 

18세기 초 남자 복식(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루이 15세와 프랑스장군 (1704-1730) (출처-https://www.siue.edu/COSTUMES)

코트

코트는 18세기에 유럽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입었는데, 나라마다 옷감의 재질이나 장식에 따라 명칭에 차이가 있었다.

코트를 프랑스에서는 쥐스토코르(justaucorps)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17세기에 네덜란드가 패션을 주도하던 시기에 시민 중심의 모드가 되면서 널리 입기 시작하여 18세기로 전해 내려온 의복이다. 쥐스토코르는 처음에는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으나 차츰 하류층에서도 입게 되었고, 이것과 형태는 같으나 옷감에서 실크나 벨벳 등 값비싼 직물에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아 장식한 것은 아비 아 라 프랑세즈(habit 'a la francaise)라고 하였다.

1730년대 이후 인포멀한 코트로 프록이 영국에서부터 유행되어 프랑스에서는 18세기 후기에 널리 입게 도었다. 그밖에 라이딩 코트(riding coat)는 영국에서 처음 입기 시작한 승마용 코트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레이트 코트(great coat)라고도 한다.

18세기 전기의 코트는 무릎 바로 아래 길이로 허리는 꼭 맞고 도련으로 갈수록 플레어 지는 형태이다. 18세기 초에는 앞이 약간 파인 둥근 목둘레로 칼라가 없었고 1720년 이후 목둘레가 점점 위로 올라가 목에 잘 맞게 되었고, 후기에는 스탠딩 칼라가 달렸다.

영국의 경우 스탠딩 칼라의 너비가 1760년대에는 2.5센티미터에서 1780년대에는 약 4센티미터로 넓어지고 1790년대에 더욱 넓어진 것이 어깨로 내리 접히면서 칼라와 라펠(lapel)이 생겨났다.

코트의 재단 방법에 있어서 양쪽 옆선과 뒤 중심에 허리선 아래로 트임이 있고 옆선에 3개 내지 6개의 주름이 있어서 넓게 퍼지고 코트의 허리선이 아랫부분에 풀 먹인 아마포로 심을 넣고 도련에 고래수염, 말총, 철사 등을 넣어 뻗치게 하였으므로, 남자 코트의 실루엣이 같은 시기의 여자 가운의 확대된 실루엣과 조화를 이루었다. 코트를 여미지 않고 입어서 속에 입은 조끼가 많이 드러나게 하거나 허리에서 한두 개의 단추만 끼웠으므로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고 아랫단은 넓게 퍼졌다.

18세기 전기의 소매 형태는 소매통일 잘 맞고 커프스가 없이 소매 끝에 트임이 있고 단추가 달려 있는 것과 넓적한 커프스가 달린 것이 있었으며, 소매 끝으로 셔츠의 러플이 보이게 입었다. 후기로 갈수록 넓적한 커프스는 점차 없어지고 폭이 좁은 것이나 손목에 잘 맞는 것이 1770년대 이후 유행하였다. 커프스가 달리진 않은 것에는 수를 놓거나 브레이드 장식과 단추를 달았다.

포켓은 허리선 아래에 낮게 달렸던 것이 1720년 이후 허리선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 달리고 포켓 뚜껑의 너비가 세기의 진행에 따라 좁아졌다.

코트의 앞 중심선은 거의 직선이던 것이 1740년대 이후 허리선이 아래부터 뒤쪽으로 휘어지기 시작하여 옆선도 뒤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뒤품이 좁아졌다.

1760년대에는 코트의 플레어진 모양이나 뻣뻣하게 심을 넣은 것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러운 형태로 코트의 볼륨이 많이 줄어들었다.

1780년대에 남자 복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혁명기의 불안한 상황이 영국과 프랑스 멋쟁이들의 의상에 반영되었는데, 가장 눈에 뜨이는 변화는 코트의 볼륨이 줄어들고 코트의 앞자락 끝이 무릎 뒤쪽으로 가서 바지가 거의 다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1790년대에는 커다란 라펠이 생겨나고 허리선 아래 앞자락을 잘라낸 것 같은 현대의 테일 코트(tail coat)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코트 앞 중심에는 목둘레에서 허리선까지 혹은 단까지 촘촘하게 단추를 달고 단춧구멍을 수평 방향으로 내었으므로 매우 장식적이었다. 코트의 단추는 조끼의 단추보다 큰 것으로 달았고 값비싼 단추를 달아 재력을 과시하였다. 단추에는 금속 단추, 싸개단추, 보석 단추 등이 있었다. 금, 은, 황금, 백랍으로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것, 금박을 입힌 것이 있었고, 싸개단추에는 나무에 벨벳, 브로케이드, 코트와 같은 천으로 싸서 만든 것, 금사, 은사를 꼬아서 씌운 것 등이 있었다. 그밖에 보석, 반보석을 단추에 사용하였다. 전기에는 단추의 크기가 작고 돔(dome) 형태이었던 것이 후기로 갈수록 납작해지고 크기가 커져서 1775~1788년에는 단추의 지름이 5센티미터가 넘는 매우 큰 단추가 유행되어 시사만평의 소재가 될 정도였다.

궁정복, 예복에 쓰인 코트의 옷감을 실크, 브로케이드, 꽃무늬가 있는 벨벳 등으로 금실, 은실을 짠 화려한 재료가 쓰였고, 무늬가 없는 경우에는 언제나 금, 은실로 수를 놓았다. 일상복으로 입은 코트의 옷감을 다마스크, 벨벳, 새틴, 모직물 등이 쓰였다.

옷감의 색상은 검정, 갈색과 같이 수수한 색과 짙은 청색, 청록, 포도주색, 분홍, 주황 등 다양하였다.

1770년대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널리 보급되어 입혀진 프록(frock)은 프랑스에서는 프라크(frac)이라고 하였다.

프록은 1730년 이전에는 노동자 계층에서 입었던 헐렁한 코트로서 일할 때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덧입었던 농부의 작업복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1730년 이후 신사들이 말을 탈 때, 운동할 때, 평상시에 편안한 의복으로 입기 시작하여 1770년 이후는 널리 유행하였다.

운동할 때 입는 프록보다 몸에 잘 맞게 정교하게 잘 재단된 프록을 프록 코트라고 한다. 이 코트가 초기의 코트와 다른 점은 딱딱하게 심을 넣지 않아 코트보다 자연스러운 실루엣에 편안한 형태이고 턴다운 칼라가 달린 점이다.

칼라는 몸판과 색다른 벨벳으로 만든 것이 있었고, 칼라의 형태는 플랫 칼라, 롤칼라 등 여러 가지 변형이 있었다. 프록의 소매는 소매통이 잘 맞는 형태로 후기로 갈수록 타이트해졌다. 커프스가 달린 것과 커프스가 없이 손목에 트임이 있고 단추가 달린 것이 있었다. 앞 중심선은 뒤쪽으로 휘어져 앞이 벌어진 형태이며 점점 품이 좁아져서 1790년대에는 코트와 마찬가지로 테일 코트처럼 되었다. 앞여밈이 더블 여밈인 것은 1780년 이후 일반화되어 운동할 때 주로 입었고 라펠이 달려 있다.

단추는 코트와 비슷하나 프랑스 궁정에서 입은 프라크 외에는 금속단추를 주로 달았다.

프록의 옷감은 모직물, 능직면포, 서지(serge)가 많이 쓰였고, 궁정복 이외의 것에는 수를 놓지 않았으나 금, 은색 브레이드 장식을 한 것이 더러 있었다. 칼라는 몸판과 다른 색의 벨벳으로 하거나 털로 만든 것, 커프스에 안단을 댄 것도 있었다.

1780년대에는 라이딩 코트가 중요한 의복 품목이 되었다. 프랑스에도 르댕코트(redingote)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전래되어 일상복으로 입었다. 형태는 더블 여밈에 큰 칼라와 라펠이 특징으로 1780년대에는 이러한 더블 여밈과 여러 겹의 칼라와 큰 라펠의 코트를 입은 것이 유행에 앞서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