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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17세기 복식7(바로크 시대)

위그(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퐁탕주(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깃털 모자(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헤어스타일과 모자

헤어스타일은 의복 디자인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17세기 초기에 러프가 성행하는 동안은 짧은 머리가 유행하였다. 남자의 짧은 머리는 이마에서 뒤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 형과 앞이마가 덮이는 형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곱슬거리게 하였다.

17세기 전반을 통해 수염을 깨끗이 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630년대 이후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다. 콧수염에 왁스를 발라서 좌우로 벌리는 형태로 고정시킨 예도 있었다.

중기부터 남자들의 머리가 길어져서 어깨를 덮을 정도가 되고, 왼쪽 머리 다발을 리본으로 묶어 가슴 쪽으로 늘어뜨린 것을 러브록(love lock)이라고 하였으며 양쪽을 늘어뜨린 것도 있었다.

1660년대 이후 페리위그(periwig)나 풀 보텀드 위그(full-bottomed wig)를 쓰는 것이 널리 유행되었는데, 프랑스 궁정에는 200여 명의 가발 만드는 사람들이 고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페리위그는 앞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형으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어깨와 앞가슴으로 내리 덮이며 가루를 뿌려서 썼다. 가발의 재료는 자신의 머리나 염소털, 말총 등이 쓰였으며, 염색을 하였다. 밝은 갈색의 가발이 선호되어 값이 제일 비쌌고, 제일 싼 것은 검은색이었다.

풀 보텀드 위그는 매우 거대하고 무거워서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였으나 서유럽 상류층에서는 1700년까지 이 가발을 쓰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며, 이러한 가발을 쓰려면 자신의 머리는 면도를 하거나 짧게 깎아야 꼭 맞게 쓸 수 있었다.

여자들은 이러한 가발을 쓰지 않았다. 초기의 여러 머리형은 머리카락을 앞에서 뒤로 올백형으로 높게 빗어 넘겨 리본으로 매어 주고 진주나 보석, 헤어핀으로 꾸몄다. 중기에는 머리카락을 컬하여 얼굴 양옆으로 볼륨 있게 부풀린 형이나 컬한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후기에는 머리 전체가 컬로 뒤덮여서 매우 환상적인 이름들이 붙었다.

남자 모자는 기사들이 썼던 챙이 넓은 모자와 크라운이 높은 슈거로프 해트(sugar-loaf hat)가 주류를 이루었다. 크라운이 둥글거나 편평하고 챙이 넓은 모자는 1620년 이후 챙이 매우 넓어지고, 1650년경 크라운이 높아지면서 원추형이 되었다가 점차 낮아지고 원통형의 크라운이 되었다.

챙의 한 면을 젖혀서 핀으로 고정시키고 핀 꽂은 뒤쪽에 깃털을 꽂았다. 챙의 어느 한 모퉁이를 위로 말아 올려서 쓰는 것이 처음에는 개인의 취향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690년대에는 세 면을 위로 젖혀서 썼는데, 이 세 모서리 모자(tricorn hat)는 신사의 모자로 정착됨과 동시에 상류 계급과 전문 직업 종사자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후기에는 가발이 커지면서 모자를 쓰지 않거나 손에 들고 다녔다.

영국의 경우 남자들은 실내에서도 식사 때나 정식의 모임에서 모자를 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으며, 국왕이 있는 자리에서는 신하들은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였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남자의 경우와는 달리 모자를 많이 쓰지 않았고, 후드 달린 케이프를 입고 외출하거나 레이스 천을 머리에 둘러썼다.

여자 모자의 형태는 초기에 프렌치 후드(french hood)나 메리 스튜어트 후드를 썼고, 남자 모자와 유하산 챙이 넓은 모자나 슈거로프 해트를 썼다.

1690년대에 여자의 새로운 머리 장식으로 퐁탕주가 나왔는데, 숙녀들이 말을 탈 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생겨난 것이 스타일로 정착하여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행하였다.

퐁탕주의 구성 방법은 리넨이나 레이스를 주름잡아 두세 층으로 탑처럼 세우고 철사로 틀을 만들어 서게 받치고 리본으로 장식하였다. 모자의 재료는 펠트직, 벨벳, 실크, 밀짚이 사용되었고, 모자의 크라운에 벨벳이나 태피터로 안을 넣어 만들었다.

모자의 장식은 크라운과 챙 사이에 띠를 둘러 멋을 부렸는데, 넓적한 리본으로 띠를 두르거나 단추를 한 줄로 장식한 것이 있었다. 그밖에 새끼줄처럼 가공한 금, 은, 구리 등 금속 띠를 두른 것, 리본 다발 뭉치나 타조 깃털을 꽂아 장식한 것 등이 있었다.

신발

17세기 과장된 복식 스타일이 남녀의 신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츠의 입구가 깔대기 모양이나 나팔꽃처럼 넓게 퍼지고 레이스 장식을 한 것이나 장미꽃 모양, 토끼귀 모양의 리본을 발등에 장식한 것 등에서 17세기 부츠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부츠와 슈즈의 앞부리 모양은 1630년대까지 둥근 모양이었고, 1640년대 이후 1700년까지 네모난 형과 발부리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이 유행하였다. 뒤꿈치의 힐은 나무에 가죽을 씌우거나 코르크로 만든 낮은 것이 1620년대까지 일반화되었으나, 1640년대 루이 14세 통치 기간에 차츰 높아지고 힐의 밑면은 네모나고 휘어진 힐의 모양이 나왔다.

루이 14세와 프랑스 궁정인들이 신기 시작한 붉은색 힐이 18세기 말까지 유행하였다.

슈즈의 모양은 남녀의 것이 비슷하였고 대개 검은색이었으며, 여자의 것이 브로케이드나 벨벳에 수를 놓는 등 좀 더 섬세하게 제작되었다. 여자들은 굽이 매우 높은 초핀도 신었다. 슈즈의 발등에 리본을 매던 것이 1610년 이후 큰 장미 모양으로 바뀌었고, 리본, 레이스, 스팽글로 만든 장미꽃 모양(shoe rose)의 장식이 점점 커져서 발을 덮을 정도가 되었다.

초기의 부츠는 종아리에 잘 맞는 무릎 아래 길이나 무릎 위까지 닿는 긴 것이 있었다. 이러한 부츠는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었으므로 부츠의 입구가 아래로 접히게 신기도 하고 바지에 끈으로 연결하여 신기도 하였다. 1630년대부터 부츠의 입구가 넓어져서 위로 갈수록 깔때기처럼 퍼지는 형이나 바깥쪽으로 넓적한 부츠 커프스가 생기는 것이 있었다. 부츠에 밝은 색의 천으로 안을 넣은 것이 있었고, 발등에 가죽으로 된 나비 모양이나 부츠 뒤쪽에 박차(spur)를 달았다. 깔때기 모양의 부츠는 처음에는 승마용이었으나 1610년경부터 귀족 계급의 남자들이 평상시나 실내에서 신었으며, 잭 부츠(jack boots)가 유행하였는데 잭 부츠는 단추, 끈, 버클로 꼭 맞게 조여 신었다.

신발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전세기에 신었던 패튼과 같은 기능의 나막신과 슬리퍼형의 신발이 있었다. 슈즈와 부츠의 재료는 브로케이드나 벨벳과 소가죽, 양가죽, 염소 가죽, 사슴 가죽 등이 쓰였다.

액세서리

남자들은 칼을 차던 허리의 가는 벨트 대신 길고 넓적한 띠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매었다.

1620년대부터 어깨에 걸치기 시작한 이 수대(baldric)는 가죽으로 만들거나 비단, 벨벳 등에 수를 놓은 것이 있으며, 군복을 입고 허리에 넓은 천으로 띠를 둘러매는 것과 함께 남자의 용맹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단검은 없어지고 긴 칼을 수대에 찼다.

허리띠에는 작은 돈주머니를 매달기도 하고, 17세기 초에 발명된 회중시계를 바지 벨트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유행하였다.

여자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에이프런을 실용과 장식의 목적으로 입기 시작하였다. 하류계층이 실용적인 에이프런은 치맛단까지 내려오는 긴 것으로 흰색의 단순한 형태이고, 궁정의 여자들이 입은 것은 무릎길이의 짧은 것과 스커트 도련까지 닿는 것이 있었고, 대개 비치는 옷감에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르거나 컷 워크, 자수 장식한 것 등이 있었다.

손수건은 남녀 모두 사용하였다. 손수건은 장식적인 목적으로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소매의 슬래시, 바지의 포켓에 찔러 넣고 다니기도 하였다. 당대의 인물화에서 매우 큰 손수건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수건의 재료는 고급 아마포, 면포 등에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수를 놓는 등 값이 비싼 품목으로서 당시에 귀한 선물용으로 이용되었다.

17세기에 장갑이 매우 정교해지고 팔꿈치길이의 긴 장갑이 나왔다. 남녀가 착용한 손목 길이의 장갑은 손목 둘레가 꽃잎 모양으로 스캘럽(scallop)되거나 프린지 장식이 있는 것이 있고, 손목 둘레가 나팔꽃처럼 넓게 퍼진 것 등이 있었다. 장갑의 재료는 양가죽, 송아지 가죽, 사슴 가죽에 자수, 레이스, 프린지, 리본, 털 장식을 하였다. 또 장갑에 향수를 뿌려서 사용하였다.

토시(muff)는 여자들이 처음 사용할 때는 크기가 작았으나 1630년이후 점점 커지고, 후기에 남자들의 토시는 베개처럼 큰 것을 손에 끼지 않을 때는 비단 띠로 매달아 앞에 차고 다녔다.

토시의 재료는 벨벳, 실크, 털로 만들었고 털로 안을 넣은 것, 입구를 털로 장식한 것, 수를 놓은 것 등이 있었으며, 토시는 부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사치 품목에 속하는 것이었다.

부채를 들고 다니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장식적인 은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깃털 부채나 접는 부채가 있었다. 접는 부채를 겨울에 들고 다닌 점으로 보아 손수건을 들고 다닌 것처럼 장식품과 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과시의 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스크는 축제와 같은 모임에서 변장을 하기 위해서나 외출할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얼굴의 위쪽 반을 가리는 것과 전체를 덮어 가리는 타원형의 것이 있었다. 재료는 벨벳, 실크, 태피터, 가죽을 사용하였고 실크로 안을 대었다.

얼굴에 헝겊 조각을 붙이고 화장을 짙게 하는 것이 1640년대부터 말기까지 인기가 있었다. 이 패치(patch)는 태피터를 점 모양, 초승달, 별 모양으로 오려서 얼굴에 풀로 붙이고 다녔는데, 이것은 잘 떨어져서 여분의 패치를 거울이 달린 작은 상자에 넣고 다니다가 다시 붙이기도 하였다. 패치의 모양과 붙이는 위치에 따라 고유한 이름이 붙었으며, 연인 간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약속하는 무언의 비밀 메시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비단실로 엮어 만든 이어스트링(earstring)을 한쪽 귀에만 단 것이 특이하며, 목걸이, 반지는 정교한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휴행함에 따라 단순한 것이 유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