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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18세기 복식1(로코코 스타일)

18세기 복식의 역사적 배경

 18세기에는 바로크 시대의 거대하고 화려한 복식에서 로코코 스타일(Rococo style)의 섬세하고 우하한 복식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로코코 스타일은 1720~1730년 사이에 전 유럽에 퍼져 나갔고, 건축, 실내장식, 가구, 그림, 조각, 음악 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직물의 문양이나 복식에도 적용되었다. 이 스타일은 고딕이나 바로크 스타일이 건축 양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비해 장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아하고 섬세한 곡선이 경쾌한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상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인간 중심 사상이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계몽주의로 확산되어 이성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지적인 자각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고, 과학, 문학, 미술, 의식주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정신 면의 여러 가지 인식 변화가 사회, 경제 구조, 정치 조직, 생산 방법 등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경우 과학뿐만 아니라 농업 목축 기술이 개발되어 대농 경영이 증가하면서 농업 생산성이 현저하게 향상되었고, 양을 사육하여 양모 생산량도 많아졌다. 자본의 축적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18세기 중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 혁신에 의해 생산과 분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섬유 부문에 있어 방적기, 직조기의 새로운 발명은 종래보다 폭이 넓은 직물을 수직기에 비하여 10배의 생산 속도로 직조해 낼 수 있었으므로 근대 복식 발전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통치 기간에 영토 확장을 전쟁에서 막대한 제원을 소모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워졌으나 루이 15세의 궁정과 귀족 계급의 쾌락 추구의 성향이 프랑스 복식을 더욱 매혹적이고 우아한 것으로 발전시켜 전 유럽이 프랑스 스타일을 따랐다.

 

 루이 15세의 애인 퐁파루드(Pompadour)와 뒤바리(Du Barry),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의 복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프랑스의 복식 유행을 따랐으므로 이들은 당시 유럽의 패션 리더의 역할을 하였다.

 

 퐁파두르는 음악, 연극, 회화, 조각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예술가들을 직접 후원하였으므로, 영향력 있는 그녀의 개인적 취향이 프랑스 예술 전반에 발전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황실 전속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Rose Bertin)을 기용하여 자신의 의복을 만들도록 하였고, 베르사유궁의 정원에 축소형 농장을 만들어 놓고 시골풍의 의복을 입었으며, 연극에 출연하여 젖 짜는 처녀 역을 즐겼는데, 이러한 왕비의 옷차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복식에 도입되어 널리 유행하였다.

 

 프랑스는 온 나라가 연극에 열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극 관람을 즐겼고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과 분장을 하고 출연하는 여배우는 사교계에서 찬미의 대상이었다. 관람객들의 선망의 대상인 연극 무대의 여자 배우 의상이 일반 복식에서 재현되어 여자 가운의 형태가 더욱 다양해졌다.

 

 18세기 복식에 영향을 준 또 다른 요소는 동양 문화이다. 유럽 여러 나라가 중동이나 극동과 활발하게 무역을 추진하면서 페르시아, 인도, 중국에서 직물을 수입해 왔고 동양 문화에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동양의 건축, 가구, 도자기가 유럽 예술가와 장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후기에는 프랑스가 영국의 영향을 받았고, 1789년에 일어난 대혁명 이후에는 유럽 패션의 중심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18세기 복식의 일반적 특징

 복식 변화의 방향은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왕족, 부유한 상인, 로마 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당시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부유한 상인들은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화가는 그의 후원자의 마음에 들도록 고상하고 화려하며 심미적인 곡선으로 구성된 형태의 의상과 낭만적인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으므로, 화가들의 그림이 의복의 색채, 장식물, 디자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8세기 초에 와토(Watteau)는 전원의 목가적인 배경을 넣어 바로크 예술의 형식적인 것에서 좀 더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로코코 예술로 전환시켰다. 의상의 표현에서 와토는 뒤 목둘레에서 큼직한 맞주름이 스커트 단까지 풍성하게 퍼지는 우아한 가운을 그려 후에 이 가운에 와토 가운이란 이름이 붙었다.

 

 18세기 중기는 퐁파두르의 취향이 복식에 나타난 시기로서, 뛰어나 예술적 감각을 지녔던 퐁파두르의 의상 품목은 모두의 패션에 반영되었다. 퐁파두르의 가운에서 앞가슴 깊숙이 파여진 네모난 목둘레와 리본으로 뒤덮인 스터머커, 페티코트의 플라운스, 소매의 앙가장트, 레이스, 리본, 꽃 줄 장식 등이 로코코 스타일을 그대로 잘 나타내 준다. 퐁파두르가 즐겨 입었던 꽃무늬가 있는 프린트 실크는 퐁파두르 태피터로, 머리 모양은 퐁파두르 헤어스타일로 복식사에 고유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 시대에는 물리, 화학의 발달로 염료의 질이 좋아지고 염색 방법이나 염색 기술이 발달하여 직물이나 의복의 색채가 세련되었다. 특히 여자 가운에 줄무늬, 꽃무늬가 있는 옷감이 많이 쓰였고, 가운에 조화나 코르사주(corsage)의 꽃 장식과 주름 장식을 하여 복식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술 작품과 같은 의상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로코코 스타일의 의상은 그 당시 유럽 문화가 육체의 에로티시즘을 강화하기 위해 복장에서 발견한 가장 세련된 결정체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거대하게 꾸민 머리 장식과 가는 허리에 양옆으로 확대된 스커트의 볼륨 또한 이 시기에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스커트 밑에 받쳐 입은 파니에(panier)가 지름이 약 1.5미터, 도련 둘레가 5미터나 되게 극단적으로 확대되었을 때에는 성직자, 신문, 작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확대시키는 유행이 별로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한다.

 

 연극 의상에 있어서는 여배우가 고대 그리스 연극에 출연한 경우 18세기 의상을 입지 않고 그리스 시대 의상을 입었으므로 복식에 새로우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아드리엔 가운(adrienne gown)은 고대극에서 글리세라(Glycera)역을 맡았던 당쿠르(Dancourt)라는 여배우가 입었던 의상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 밖에도 정치, 사회적인 큰 사건에서 이름이 붙여진 의복이나 옷감 이름이 생겨나고, 세기의 진행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스타일이 창안되어 여자 가운의 종류가 많아졌다.

 

 더욱이 동양과의 무역이 잦아지면서 동양 문화의 영향이 복식에도 나타났다. 페르시아 직물의 문양은 루이 16세 통치 기간 중에 줄무늬나 꽃무늬가 그대로 실크에 복사되었고, 인도의 프린트 면직물은 남자의 모닝 가운이나 여자 의상에 많이 쓰였다. 동양의 탑 모양에서 유래된 형태가 복식에 나타나며, 고깔 형태의 모자, 남자들의 피그테일(pigtail), 가발 등은 특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