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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17세기 복식4(바로크 시대)

17세기 남자 복식

웨이스트 코트

웨이스트 코트(waist coat)는 더블릿이 없어지면서 생겨난 의복이다. 평상시에 이 웨이스트 코트를 웃옷으로 입고 외출할 때는 코트를 덧입었다.

 

 형태는 튜뷸러한 실루엣에 몸에 잘 맞고, 처음에는 엉덩이 길이였으나 점차 길어지면서 1690년대에는 코트 길이보다 약간 짧았다. 앞여밈에 작은 단추가 수직 방향으로 촘촘히 달려 있고 허리선 아래에 수평으로 포켓이 달려 있다.

 

 소매는 잘 맞고, 길이가 코트의 소매보다 길어서 넓적한 커프스를 겉으로 접히게 입었다. 

 

 덴마크왕 프레데릭(Frederick)의 결혼 의상은 겉의 코트는 붉은색 벨벳에 은사로 앞단과 소매에 화려하게 수를 놓았으며, 웨이스트 코트는 청색과 은색의 브로케이드로 만들었고, 앞 중심에 단추가 촘촘히 달려 있다.

 

 대게 웨이스트 코트의 앞판은 실크나 브로케이드와 같이 값비싼 직물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뒤판은 마직물로 만들었다. 현대 남자 양복 조끼의 뒤판을 안감이나 값이 싼 얇은 직물로 만드는 것에서 17세기 웨이스트 코트의 자취를 엿볼 수가 있다.

 

 1690년 이후 조끼는 무릎 바로 위 길이에 앞판으 허리에서 몇 개의 단추만 끼우고 나머지 단추는 장식적인 역할만 하였는데, 단춧구멍은 버튼 홀 스티치로 처리되어 있다. 이 옷은 코트 속에 입으면서 소매가 없어지고 남자 조끼의 원조가 되었다.

 

코트

 1660년대에 코트는 조끼와 같이 생겨난 것으로 프랑스어는 쥐스트코르(justaucorps)라고 한다.

 

 가장 일반적인 코트의 형태는 튜뷸러한 직선적인 실루엣에 옷 길이는 무릎길이이고 칼라가 없는 라운드 네크라인이다. 앞 중심에 단추가 촘촘하게 달리고, 소맷부리에는 겉으로 접힌 넓적하고 장식적인 커프스가 달려 있다.

 

 조끼처럼 허리선에서 훨씬 아래에 수평으로 째어진 포켓이나 포켓 뚜껑이 달려 있으며, 포켓에 달린 단추나 단춧구멍은 장식을 위한 것이었다.

 

 1680년대의 코트는 허리가 꼭 맞고 양옆 허리 부분에 크게 두세 개의 주름을 잡아 주어 코트가 아래로 퍼지는 형태이고, 포켓이 위로 올라갔다. 제복으로 입는 코트는 고리 모양의 리본 다발이나 코드(cord) 뭉치를 양어깨에 붙였는데, 이러한 어깨 장식이 현대 군복이나 예복에 남아 있다.

 

 1690년 이후의 코트는 몸에 꼭 맞고 허리선이 뚜렷해짐에 따라 아래 도련이 플레어 지게 재단되고, 뒤 중심과 옆선에 트임이 있고 포켓의 위치가 허리선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소매는 넓은 커프스를 팔꿈치 위로 접어 올려 단추로 고정시켰으므로 셔츠가 밖으로 많이 보였다. 앞여밈 단추는 허리에서 한두 개만 채워서 크라바트와 조끼가 보이게 입었다.

 

 다른 코트 종류인 캐석(cassock)은 아래 도련이 넓게 퍼지는 엉덩이길이의 코트이다. 칼라가 없는 것과 턴다운(turn down) 칼라가 달린 것이 있다. 캐석은 실용적인 코트로 1640년대에 모든 계층에서 널리 입었으며, 말을 탈 때에도 입었다.

 

 코트의 재료는 초기에는 모직물을 사용하여 시민복의 단순한 스타일로 출발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귀족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화려한 색상의 벨벳, 실크 등을 사용하였다. 금, 은실로 수를 놓거나 코드로 장식을 하여 화려해진 코트는 크라바트와 함께 귀족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모직물로 만든 코트를 귀족뿐만 아니라 하류 계급에서도 착용하였고, 코트는 아래에 바지와 함께 입는 웃옷으로 정착되면서 남성복의 정형화가 이루어졌다.

 

바지

바지는 17세기에 여러 가지로 형태상의 변화가 있었다. 1620년대까지는 16세기에 입었던 트렁크 호즈와 베니션즈이나 갤리개스킨즈를 입었다.

 

 초기의 트렁크 호즈는 코트피스가 없어지고, 부풀리기 위한 심을 넣지 않고 겉감과 안감의 두꺼운 질감에 의해 약간 부풀렸다. 트렁크 호즈는 양파 모양으로 부풀린 부분의 길이가 짧으면 무릎까지 닿는 긴 캐니언즈(canions)가 붙어 있고, 점차 바지가 무릎길이까지 길어지면서는 무릎 바로 아래에 닿는 짧은 캐니언즈가 붙어서 캐니언즈가 바지의 주름을 정리하고 양말과의 연결 부분의 기능을 하였다.

 

 1629년 영국 찰스 1세의 초상에서 보면 둥근 양과 모양은 완전히 없어지고 무릎길이의 바지가 되었다.

 

 1630년대 이후 더블릿의 옷 길이가 짧아지면서 바지는 오히려 길어지고 바지통이 직선으로 변하였다. 바지허리의 주름이 없어지고 직선으로 된 바지통의 옆선에는 브레이드를 붙이고 허리나 도련에 리본 장식을 하였다. 또한 바지의 앞터짐이 생겨서 중심에 플라이(fly)와 단추가 달려 여밀 수 있게 되었다. 바지허리의 연결 방법은 1630년대까지는 더블릿에 끈으로 연결하였고 그 후 1650년대까지는 더블릿에 링을 달고 바지허리에 후크를 달아서 후크를 링에 걸어 입었다. 1660년대 이후는 더블릿에 연결시키지 않고 입었다.

 

 17세기 중기에 스커트처럼 보이는 품이 넓은 바지가 나타났는데, 이 바지는 궁정이나 귀족 사이에서만 유행하였던 의복이다. 이 바지는 랭그라브(rhingrave) 또는 페티코트 브리치즈라고 하며 짧은 스커트나 디바이디드 스커트와 같은 형태로 허리둘레와 도련의 양옆에 화려한 색의 리본 다발을 붙여서 17세기 남성복의 과장된 바로크 스타일의 본보기가 되었다.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 소장의 페티코트 브리치즈는 한 옷에 사용된 리본의 색깔, 리본의 너비, 직조 법이 다른데, 리본의 색은 흰색, 베이지, 분홍과 검은색 줄이 가운데 있는 것 등이며, 직물은 짙은 베이지와 상아색 실크로 되어 있다.

 

 페티코트 브리치즈에는 레이스와 리넨으로 만든 카논(canons)이라는 전등갓 모양의 무릎 장식을 하였다.

 

 1680년경부터 입기 시작한 브리치즈는(breeches)는 허리에 약간의 주름이 잡히고 무릎 바로 아래에 밴드가 있어서 단추나 버클로 잠그게 되어 있다.

 

 17세기 후기의 바지에는 옆선에 포켓이 안감 쪽으로 달려 있고, 허리벨트에 시계를 넣는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다.

 

 무릎길이의 바지에는 양말이 장식 효과를 냈으므로 여러 가지 색이 쓰였는데, 주황, 초록, 빨강, 검정, 흰색, 회색 등의 양말이 있었다. 양말 재료는 저지, 리넨, 실크로 만들거나 편물로 된 것이 있으며, 발목 안쪽과 바깥쪽에 수를 놓은 것이 있었다.

 

 양말대님은 긴 헝겊띠를 무릎 바로 아래에서 리본처럼 매어 늘어뜨리거나 가죽끈으로 매고 버클로 잠그는 것이 있었다.

 

외투

외투(cloak)는 승마나 여행할 때 주로 입었고, 1620년대까지는 16세기에 입었던 짧은 케이프형의 외투나 발목 길이의 긴 맨틀을 입었다.

 

 케이프는 1650년대까지 계속 유행하였는데, 16세기의 것보다 길이가 길고 반원이나 원형으로 재단되어 품이 넓고 안감을 대었다. 프랑스식 외투인 맨틀은 칼라가 없는 것, 세일러 칼라가 달린 것, 넓은 케이프 칼라가 달린 것 등이 있었다. 옷 길이는 무릎길이 또는 무릎 아래 길이의 것으로 속에 입은 코트와 조화되게 배색을 하고 털 장식을 하거나 장식적인 단추를 다는 것이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스페인식 외투는 옷 길이가 짧고 후드 달린 것이 있었는데, 후드 달린 것은 성직자들 외에는 특별한 경우에 입었다. 네덜란드식 외투는 스페인식과 비슷하여 소매가 있고 풍성하게 품이 넓은 형태이다.

 

 프랑스 남자들은 온화한 날에는 케이프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치고 흘러내리지 않게 끈으로 고정시켜 입기도 하였다.

 

 1670년대에 유행한 품이 넓고 종아리길이의 헐렁한 외투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는 브레이드 여밈 장식에 그 특징이 있다. 브란텐부르크는 원래 독일의 지역 이름인데, 군인들이 입었던 그레이트 코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앞가슴에서 굵은 브레이드로 여미는 것을 현대 복식에서 브란덴부르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