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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17세기 복식1(바로크 시대)

역사적 배경

17세기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Baroque)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군왕 주도의 절대주의 시대에 해당되며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의 지배에서 벗어난 계몽주의 시대에 해당된다.

 

 바로크 예술은 절대주의의 궁정과 반종교 개혁의 정신을 모체로 하여 개화된 예술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바로크 양식은 16세기에 미켈란젤로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창조해 내 균형과 조화를 이상으로 한 르네상스 양식과는 다르게 일그러진 진주처럼 기묘하고 불규칙한 조형을 나타낸다. 또한 바로크 양식은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에서 분출하는 자유분방함이 율동감을 나타내는 곡선의 예술적 표현으로 추구되었다. 회화에서는 장식적이고 화려한 화법이 주류를 이루었고, 빛과 그늘을 강렬하게 대비시킨 인상파적인 화풍이 등장하였다.

 

 복식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서 16세기보다 실루엣이 더 확대되기도 하고, 리본 다발을 과도하게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적 흐름을 살펴보면 유럽의 헤게모니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부터 프랑스로 옮겨갔다. 스페인은 1588년 영국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왔던 막대한 재원을 전쟁 비용에 다 써버려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분열로 해서 세계 패션을 주도하던 힘을 잃어버렸다. 패션의 경쟁에서 스페인은 1610년대까지는 프랑스와 겨루었으나 1650년대 이후 완전히 퇴진하였고, 스페인과는 대조적으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네덜란드는 무역 상인의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한 공화제 국가 체제가 유럽 다른 나라의 절대 군주제나 봉건제보다 앞서는 데서 비약적인 상공업 국가로서의 발전을 가져왔다.

 

 네덜란드는 중상주의의 모험 정식으로 동양과의 무역을 주도 하였고, 스페인,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온 무어인, 유대인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였으므로 급속하게 선진국으로 부상하였다. 네덜란드는 기업의 발달과 더불어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는 루벤스(Rubens), 렘브란트(Rembrandt), 할스(Hals) 등의 출현으로 예술에 있어서도 융성하였다.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복식이 유럽 패션에 영향을 미쳤는데, 귀족 중심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 정신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생활신조에 따라 복식에서 실용성과 합리성을 일반화시키는데 기여하였고, 프랑스와 함께 17세기의 유럽 패션을 이끌었다. 따라서 왕족과 지배 계층의 남자 복장은 입고 활동하는 데 편한 형태로 바뀌는 복식 사상 중요한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왕과 의회 간의 정치적인 분쟁과 크롬웰에 의한 혁명, 시민전쟁 등의 내란을 겪었다. 더구나 1665년에 발생한 흑사병의 만연과 1666년에 있었던 런던의 대화재는 막대한 인명과 경제적 손실을 가졌왔으므로, 크롬웰이 다스리던 공화정 시기인 1650년대는 영국의 복식이 청교도들이 지향하는 검소하고 단순한 경향을 띠었으며, 왕정복고 기인 찰스 2세 때부터 다시 화려해졌다.

 

 독일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대립에서 시작된 30년 전쟁(1618~1648의) 전쟁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인명 피해를 냈고, 국토가 황폐해져서 17세기 전반에는 유럽 여러 나라가 개입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프랑스는 앙리(Henri) 4세가 종교 개혁 이후 나라의 재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루이 13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루이 13세는 재상 리슐리외(Richelieu)를, 루이 14세는 마자랭(Mazarin), 콜베르(Colbert)를 기용하여 이들의 탁월한 외교 수완과 경제 정책에 힘입어 프랑스 절대 왕정과 경제 기반을 확립하고 유럽 패션의 지도적인 위치를 구축하였다.

 

 왕고 왕비, 궁정의 여자들이 프랑스와 유럽 패션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는 이탈리아의 의상을 프랑스에 가져와 유행시켰고, 루이 19세의 왕비 안(Anne d'Autriche)은 스페인의 모드를 프랑스에 유행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직물의 생삭과 수출을 장려하여 새로운 직물이 개발되어 생산되며 왕실에서 검증필을 해줄 정도였다. 비단의 경우, 이탈리아 상인의 중개 없이 아시아로부터 직수입하였으며, 누에치기가 번성하여 모든 종류의 비단이 리옹(Lyon)에서 생산되고, 레이스 직물의 가내 수공업도 번성하였다. 전통 있는 프랑스인의 예술적 감각으로 만들어 내는 레이스, 비단, 가구와 함께 궁중 화가가 디자인한 고블랭 벽걸이(Gobelin tapestry)는 특히 유명하였다.

 

 이탈리아로부터 많은 양의 레이스를 수입하던 때인 1628년에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가 금과 레이스를 복식에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사치금지령을 내린 이후 수입 금지에 의해 레이스가 부족하게 되자 색다른 장식 방법이 생겨났다. 즉, 리본으로 장미꽃 모양, 화한 모양 등을 리본 다발로 복식 미를 나타내는 기법이 고안된 것이다.

 

 17세기에는 처음으로 코스튬 플레이트(costume plate)가 프랑스에서 제작, 판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