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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중세 초기 복식

역사적 배경

중세는 지중해의 찬란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던 로마 제국이 395년 동서로 분리되고 5세기 말에 서로마가 멸망한 시기부터 동로마가 멸망한 15세기까지 약 천 년간을 의미한다

중세 문화의 근원은 게르만족에 의해서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문화가 게르만적인 요소들과 융합하여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갔다.

4세기 이후 전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북부 유럽에 게르만족의 여러 국가들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중 프랑크족은 갈리아(골) 지방을 통일하여 메로빙거 왕조(481~752)와 카롤링거 왕조(752~987)로 이어지는 중세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어 발전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사회 구조는 귀족,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로 되어 있는데, 귀족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나중에 봉건제로 발전하는 인적 관계를 국왕과 맺고 있었다. 상인, 수공업자는 자유민에 속하였다. 상업 활동은 대서양과 북해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졌고, 라인강, 론강, 루아르강이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경제적, 문화적 교류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교회는 막강한 조직력에 의해서 정치, 경제, 문화적 활동을 통해 유럽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성직자들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농업과 포교 활동을 하면서 고대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고 경제생활과 사회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세 사회를 지배한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영향 또한 중세 복식과 예술 양식에 나타난다.

마호메트의 경전인 코란은 번역이 금지되어 있어서 경전을 읽기 위해서는 아라비아어를 배워야 했으므로 아라비아어가 전체 이슬람 세계의 공통 언어가 되었고, 아라비아 문자가 사원 건축물의 내부 장식에 정교한 기하학적인 무늬와 함께 이용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자연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자연의 식물 모양을 도안화시킨 문양이 발달하여 당초문, 나선문 등이 많이 쓰였고 아라비아 문자를 모티브로 이용하였다.

중세 초기 복식의 일반적 특징

옛 로마 제국 영토에 이주한 게르만족들이 로마 문화에 융합되면서 복식도 복합적인 요소들을 융합하여 현대 서양 복식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서유럽인의 복식은 6세기 초까지 로마 복식의 형향이 지속되었고 그 이후는 비잔틴 복식의 영향을 받았다. 서유럽 중세의 복식은 그리스, 로마적인 복식을 기반으로 해서 금욕적인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와 사지를 감싸는 게르만적 의복 구성 요소를 혼합시켰다.

골족의 여자들은 로마 복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팔라, 스톨라를 입었고, 몸에 맨틀을 걸치고 브로치로 여며 입었다. 북쪽의 게르만족들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꼭 맞는 의복을 창안하였고, 다리를 감싸는 바지나 털가죽을 이용한 의복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의 머리와 얼굴을 완전히 감싸는 스타일이나 여자 로브의 길이가 발이 안 보이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어지면서 남자의 튜닉은 반대로 길이가 짧아져서 남녀 복식에 성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7세기 이후 비잔틴의 직물, 금은 세공품들이 전래되면서 프랑크족의 소박한 복식에서 점차 직물과 장식물이 화려해졌다. 남녀의 기본 복식은 튜닉 위에 맨틀을 입는 것이고, 남자들은 아래에 바지를 입는 것이다.

중세 초기 복식의 종류

튜닉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시대 남자의 튜닉은 긴 소매가 달린 무릎길이의 몸에 잘 맞는 형태이다. 귀족층에서는 6세기부터 8세기까지 튜니카, 팔마타를 입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남자들이 속에 리넨의 언더 튜닉을 입고 겉에는 목둘레와 아래 도련에 색이 다른 장식선을 두르고, 소매의 진동 둘레는 넓고 손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튜닉을 입었다. 9세기경의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남자의 튜닉은 무릎이 보일 정도의 길이에 도련 양옆에 트임이 있고 손목과 도련에 장식선이 있다. 손목이 꼭 끼는 소매 형태와 옷 길이가 짧아진 것과 스커트 부분이 아래로 갈수록 넓어진 것이 9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중세 복식이 몸메 꼭 맞는 의복으로 변화되는 점으로 볼 수 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여자들이 클라비가 있는 달마티카를 입거나 스커트 부분이 플레어 지는 튜닉을 입었다. 여자 복식에서 속에는 긴소매의 언더 튜닉을 입고 겉에는 소매통이 넓고 길이는 짧은 튜닉을 입었다. 카롤링거 왕조 때는 왕실 여자 튜닉의 도련과 목둘레에 금실과 보석으로 수놓은 넓적한 선이 둘러져 있고, 겉의 튜닉과 언더 튜닉의 색을 다르게 염색하여 입은 것이 있었다.

튜닉의 재료는 초기에는 동물의 털가죽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펠트직을 쓰다가 직조 기술이 발달되면서 리넨, 실크, 모직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8세기 샤를마뉴 대제의 딸들이 실크를 직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기로 갈수록 비단 직물이 튜닉과 맨틀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튜닉에는 띠를 매어 입었다.

맨틀
중세 초기에는 로마에서 전래된 팔라, 라세르나, 사굼 등을 외투로 입었다. 몸을 감싸는 외투는 직사각형의 것이나 반원형의 무거운 모직물을 어깨에 두르고 앞 중심이나 오른쪽 어깨에서 핀이나 브로치로 고정시켜 입었다.

무거운 모직은 후기로 갈수로 얇게 짠 모직물이나 실크로 대체되었고, 빨강, 주황의 폭이 좁아진 실크 맨틀이 애용되었다. 황제는 팔루다멘툼이나 로룸을 착용하였다.

바지
게르만족의 가죽이나 거칠게 짠 모직물의 바지는 계속해서 갈로 로만의 남자들이 튜닉 아래에 입었다.
4세기부터 6세기의 바지의 통의 좁아졌다. 7세기에서 9세기에는 튜닉의 길이가 무릎 위로 짧아지면서 바지 길이도 튜닉에 가리어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아지고 대신 양말이 길어져서 무릎 아래까지 오게 신었다.

헤어스타일과 모자

남자의 머리 모양은 짧게 깎거나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형이 있었고, 금발이나 붉은 머리털을 좋아하였다. 골족이 특히 붉은색 머리를 좋아하였다. 여자는 머리를 깎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자연 그대로의 머리를 늘어뜨리거나 양쪽을 길게 땋아 허리나 무릎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8세기경부터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감추는 스타일이 나타났다. 터번을 쓰거나 장방형의 천을 머리와 목에 감아서 드레이프시킨 것이 있으며, 사각형의 흰색 리넨이나 색이 있는 천을 머리에 두르고 보석 장식을 한 금속 밴드로 관처럼 써서 고정시킨 것도 있었다. 9세기부터 원형의 베일을 쓰기도 하였는데, 베일을 고정시키는 밴드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게 되었다. 보석 박힌 금 밴드는 상류 계급을 나타내고 차례로 금 밴드, 은 밴드, 하류 계급은 헝겊 밴드를 하였다. 베일을 리넨으로 만들었고 어깨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었다.

남자는 직업이나 계층에 따라 머리쓰개에 차이가 있었다. 왕이나 영주는 비잔틴 스타일의 관을 썼고, 서민들은 케이프가 붙어 있는 후드를 애용하였고 끝이 뾰족한 프리지안 캡이나 둥근 스컬 캡을 썼다.

신발

중세 초기에 유럽의 서북부 지역과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 북부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게르만족이 이주하여 살았으므로, 그들의 신발은 고대로부터 신어 왔던 샌들, 부츠, 슈즈의 여러 가지 종류와 형태가 지역의 기후나 생활 여건에 따라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사라센으로부터 가죽 다루는 기술이나 염색술이 전래되어 로마 시대에 발달되었던 신발 만드는 기술이 좀 더 향상되어 부드러운 가죽이나 비단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부츠와 슈즈를 만들었다. 슈즈는 발잔등에서 X자형으로 끈을 매어 신는 것이 있었고, 여자의 슈즈에는 발등에서 끈으로 매거나 발목에 밴드가 있었고 앞에서 버클로 잠그게 된 것이 있었다. 부츠는 발목이나 종아리 높이의 것이 있었고 형태는 로마의 부츠와 유사하다.

가죽에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나 구두창이 없이 양말처럼 보이는 부츠가 있었다. 재료는 부드러운 가죽, 비단, 리넨, 식물의 섬유 등이 이용되었다.

액세서리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게르만족에 의한 독특한 액세서리의 스타일이 많이 나타났다. 7세기 경의 특징 있는 모티브는 굵은 줄을 얽히게 엮은 것이나 뱀을 하나로 묶은 모양이다. 액세서리 종류로는 목걸이, 귀고리, 반지, 팔찌, 머리핀, 피불라, 버클 등이 있었다.

목걸이는 진주나 호박으로 만든 것이나 에나멜 세공을 한 자기, 색유리 조각이 있고 드물게 금 펜던트가 있었다. 귀고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청동과 호박으로 만든 고리 모양과 유리와 상아로 만든 기하학적인 형태의 단추 모양의 귀고리가 있었다.

반지는 로마 시대의 것과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며, 팔찌는 금이나 금을 입힌 청동제가 있는데, 팔찌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끼었다.

피불라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마차의 바큇살 모양의 피불라는 언더 튜닉을 드레이프 시키는 데 꽂거나 겉옷을 여미는 데 사용하였다. 두 번째로는 둥근 모양이나 다각형의 브로치 모양의 피불라는 보석이나 칠보로 장식하여 비잔틴의 브로치와 유사하다. 세 번째로는 둥물 모양의 피불라는 로마 시대의 피불라와 유사하나, 새로운 스타일의 것으로는 새 모양, 메뚜기 모양, 뱀 모양 등이 있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안전핀 모양의 피불라는 장식이 없이 단순하나 짧은 체인으로 연결된 한 쌍을 동시에 채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피불라들은 8세기 이후 의복이 몸에 꼭 맞는 형태로 변하면서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중세에는 거들이 중요한 장식품으로 쓰였다. 남녀가 다 튜닉 위에 착용하였는데 한 줄로 된 것, 여러 가지 재료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것 등이 있었다. 거들은 버클이나 장식판으로 채우도록 되어 있고, 버클은 대개 직사각형이 많았고 둥근형이나 삼각형인 것도 있었다. 버클 재료는 금과 은의 합금, 도금이고 드물게 뼈나 상아로 만든 것이 있으며, 버클에 조각을 하거나 칠보자기 등을 입힌 것이 있었다.

남자들은 무기를, 여자들은 주머니를 허리 거들에 매달았다. 가죽이나 헝겊으로 만든 여자 주머니에는 돈, 가위, 빗, 쪽집게 등을 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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