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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중세 중기 복식1

역사적 배경

유럽은 농업 의족적인 봉건 체제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여 도시의 발달, 무역의 신장, 공업의 기술의 발달 들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 활동이 활기를 띠면서 도시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켰다. 도시 주민이 된 상인, 직인, 자유업자들끼리 조합을 만들었으므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길드(guild)가 형성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등의 항구 도시들은 여러 가지 특권과 보호를 받으면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축적된 정치적, 경제적 세력이 후에 복식이 급격하게 화려해지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데 한몫을 하였다.

 

항구 도시들은 십자군 수송, 식량 운반, 무역 등으로 더욱 세력이 팽창하였고, 동양으로 부터 수입해 오는 진기한 물품들, 특히 벨벳, 비단, 다마스크 직물, 염료 등은 서북부 유럽인들의 욕망을 자극하였으므로, 동양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공업 기술이 부수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봉건 제도의 사회 계급은 봉건 영주, 가신, 귀족, 성직자, 농노 등으로 구성되나 여기에 상인과 장인들이 사회의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하여 13세기 이후에는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걸쳐 약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사회적인 변혁과 동서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십자군의 긴 원정 기간에 여행한 동양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체험을 하고 돌아왔으며 그 영향으로 고딕 스타일의 성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 스타일의 성당은 종교적인 숭앙의 형태로 나타났다. 고딕 라인은 생각과 느낌을 위로만 향하여 들어 올리는 무한한 수직선이며 탑과 아치 창문이 주된 선을 이룬다.

 

예술 양식에서는 1000년경에 로마네스크 스타일이 나타나서 200년간 계속되었고, 고딕 스타일이 1150년에 나타나서 12세기에서 14세기에 지배적이었으므로 로마네스크 스타일과 고딕 스타일은 얼마 동안은 동시에 나타난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특징은 둥근 아치, 거대한 기둥, 조그만 창문에 나타나며, 인물상의 장식을 조각이나 부조로 많이 하였다.

 

고딕 양식은 처음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어 영국,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등 북유럽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중세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고딕 건축 양식은 첨두형의 아치, 커다란 창문, 뾰족탑, 모자이크의 색유리 창문이 주축을 이루는데, 하늘 높이 솟은 뾰족탑과 섬세하게 조각된 성자상 등 현재 남아 있는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 중세인의 신앙심과 뛰어난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에는 봉건 제도와 기사도 정신이 여자들의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봉건 제도에 있어서 봉건  영주 밑에 귀족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신들이 서열에 따라 명예와 지위가 각각 다르고, 영주로부터 보수로 받는 토지, 무기, 말, 보석, 호화로운 의복 등에 차이가 있었으므로 보석이나 의복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기능이 생겨나게 되었다. 기사 계급의 출현과 기사도 정신은 12세기에 귀족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다소 높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기사도의 충절과 용맹, 부인을 존경하며 약한 자를 돕는 정신이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데서 신체의 미를 더욱 가꾸기 위해 복식이 화려해지고 몸에 밀착되는 형태 등 복식의 새로운 변화를 유도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세 중기 복식의 일반적 특징

12~13세기 동안에 건축과 예술에 나타난 수직성의 강조는 복식에도 나타나며, 의복은 몸에 꼭 맞는 형태가 되었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스타일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복식에 중세 유럽의 게르만적인 창조성과 동양적인 요소가 융합되어 생겨나 독특한 양식을 뜻한다. 남녀의 기본 복식은 속옷 쉥즈(chainse) 위에 블리오(bliaud)를 입고 위에 맨틀을 걸치는 것이었다. 블리오는 게르만족의 클로스란 뜻의 블리알트(blialt)에서 유래된 것으로,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아랫부분이 플레어 지고 품이 넓어진 고넬(gonelle)에서 윗몸은 꼭 맞고 스커트 부분이 더욱 플레어 지고 주름이 많아지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일반 서민복은 중세 초기의 튜닉에 남자는 호즈나 브레를 입는 활동적인 형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13세기 초기에는 12세기에 부드러운 직물을 사용하여 주름지게 하는 화사한 드레이프의 미를 구사한 것과는 달리 흑사병의 재난을 겪은 후에 의복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되었다가 후반에 다시 인체의 윤곽선을 드러내는 형태로 변하였다. 13세기에 의복이 재단에서 새로운 방법이 창안되었다. 지금까지 튜닉은 단순히 T자형의 평면 재단을 하던 것에서 소매를 여러 조각으로 재단하여 진동 둘레를 곡선으로 만들고 스커트 부분에 여러 조각의 무(gore)를 대어 플레어 지게 하는 등 처음으로 서양 의복에 입체적인 구성 방법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서양 의복이 동양 의복의 평면 구성과는 달리 평면 구성에서 입체적 구성으로 바뀌게 된 요인에 대하여는 첫 번째로는 북유럽 기후 조건이 몸에 꼭 맞는 밀착형을 필요로 하였고 두 번째로는 게르만족들이 수렵에서 얻은 모피 조각을 여러 장 이어서 만드는 과정에서 모피를 몸에 대고 맞추어 재단하는 입체 재단법을 터득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세 번째로는 십자군 원정의 결과 군복이 발달하여 갑옷이 금속판 갑옷이 되면서 갑옷 속에 입는 옷은 몸에 잘 맞아야 하므로 푸르푸앵(pourpoint)과 같이 곡선의 진동 둘레와 허리에 꼭 맞는 입체 구성의 의복의 개발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몸에 꼭 맞는 의복은 과거의 품이 넓고 헐렁한 튜닉과 같은 트기 방식으로는 입고 벗기 불편하므로 단추를 촘촘하게 달거나 끈으로 조여서 여미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러한 단추의 사용은 사라센 복식의 앞 터짐과 단추 사용의 영향을 받아 북유럽 복식에 도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새로운 의복인 쉬르코(surcot)가 생겨났고, 부인들이 많은 시간을 자수에 전념하게 되면서 자수법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기독교 정신에서 연유된 여자들의 머리와 목을 감추는 헤드드레스(headdress)가 고안되었다. 이 시기에 주로 상용된 재료에는 리넨과 실크, 모직물이었고 수달피 가죽이나 담비 털을 이용하였다.

 

11~12세기 의복의 종류

9세기경의 왕의 복장 튜닉,망토(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10세기경의 왕의 복장 튜닉,바지,망토(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12세기경 여성의 복장(출처-패션전문자료사전)

블리오 

11세기에 남녀 모두 블리오를 입게 되었다. 블리오는 이오닉 키톤의 부드러운 주름의 미와 달마티카의 풍부한 장식성이 조화된 의복으로 남프랑스에서 입기 시작하여 1130년경에는 영국에서까지 유행하였다.

 

 블리오는 윗몸이 꼭 끼고 소매가 길고 소매 끝이 넓으며, 스커트 부분이 길고 넓어서 잔 주름이 생기는 의복이다. 블리오의 소매는 부리로 갈수록 나팔꽃이나 깔때기 모양으로 넓어지고 길어서 땅에 끌리지 않게 중간에 한 번 매듭을 지어 묶기도 하였다. 목둘레는 장식선이 둘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뒤 중심에서 단추나 끈으로 여미게 되어 있다.

 

 블리오 위에 코르사주(corsage)를 입거나 넓은 직사각형의 천을 허리에 감아 허리선을 강조한 예도 있다.

여왕의 경우 블리오를 입고 그 위에 금이나 보석 장식이 있는 거들을 매었는데, 앞에서부터 뒤로 한 번 허리선에 두르고 앞쪽으로 다시 돌려 히프에 곡선으로 늘어지게 맨 다음 발끝까지 길게 끝을 늘어뜨린 예가 있다.

 

남자의 블리오는 무릎길이와 발목 길이인 것이 있으며, 허리에 벨트를 하여 주름이 지게 하였고 속에 브레를 입었다.

 

재료는 실크나 머슬린을 사용하였다.

 

튜닉

 달마티카와 튜닉을 일반 서민 계층에서 널리 입었다. 남자의 튜닉은 길이가 짧아지면서 아래에 호즈나 브레와 함께 입었다.

 

언더 튜닉은 소매가 꼭 끼고 블리오 속에 입었을 때 밖으로 보이므로 목둘레와 소맷부리에 자수 장식이 된 것이 있었다. 튜닉은 대부분 라운드 네크라인이나 스퀘어 네크라인이고 상류층의 튜닉은 목둘레, 소맷부리, 아래 도련에 장식 선을 하였다.

 

쉥즈

쉥즈는 언더 튜닉의 다른 명칭으로, 형태는 소매가 좁고 윗몸은 꼭 맞으며 스커트 부분은 넓고 길이가 길다. 소맷부리에는 수를 놓거나 장식선을 댄 것이 있으며, 목둘레를 끈으로 여몄다.

 

재료는 품질이 좋은 리넨이나 실크, 모직물을 사용하였다. 13세기부터는 이 솟옥을 슈미즈(chemise)라고 하였다.

 

코르사주

코르사주는 여자들이 블리오 위에 입은 조끼형의 의복이다. 옷 길이는 엉덩이선까지이고 허리둘레가 꼭 맞게 되어 있다. 목둘레는 좁은 것과 넓게 파여서 블리오가 보이는 것이 있으며, 목둘레에 수를 놓아 장식한 것이 있다.

 

 재료는 실크와 모직의 교직물의 얇은 천을 두세 겹 겹쳐서 금, 은, 색실을 사용하여 누비거나 스모킹을 하여 신축성을 주었다.

 

맨틀

고대부터 입어온 팔리움이나 클라미스, 팔루다멘툼은 이 시기에 맨틀(mantle)이라는 용어로 바뀌었다.

 

 남자의 맨틀은 11세기경까지 무릎길이의 것이 많았고, 형태는 직사각형, 반원형, 타원형이 있었다. 입는 방법은 몸에 한 번 두르고 오른쪽 어깨나 가슴에서 브로치로 고정시키거나 끈으로 매어 입었다. 여자의 맨틀은 반원형과 직사각형의 것이 대부분이며 머리까지 쓰기도 하였다.

 

 옷감은 실크, 모직물 등을 사용하여 겉과 안이 대조적인 색으로 하여 복식 미를 살린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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