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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서양 복식사

중세 후기 복식1

역사적 배경

중세 후기는 프랑스와 영국 간에 백년전쟁이 있었으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하여 예술과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번영의 시대였다.

 

 백년전쟁 후에 국가주의가 발달하고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새로운 상인 계급이 등장하였고, 십자군에 참여하였던 봉건 영주들이 자금난으로 봉건 특권을 상인들에게 팔았으므로 신흥 귀족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탈리아는 중세 초기부터 연안 도시의 해상 무역을 통해 수입한 물자를 육로를 이용하여 유럽 각지로 보냈으므로 그 집사지가 된 피렌체나 밀라노가 크게 번성하였다.

 

무역과 직물 산업으로 재력을 쌓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예술 분야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1455~1494년에 걸쳐 도시 국가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새로 등장한 중산 계층의 신흥 상인들은 귀족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전래의 귀족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귀족들의 생활양식과 복식을 모방하거나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해 냈다. 1425년 이후 복식이 극단적으로 화려해져서 15세기 말까지 과장과 확대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지리적 조건이나 무역 활동이 이탈리안에게 국제적인 감각을 부여하였으며, 국제 무역으로 풍부해진 의복 재료와 재력에 힘입어 복식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중세 도시의 발달과 장원 제도의 해체로 인한 유휴 노동력이 직물 제조 공장으로 흡수되어 직물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13세기경 견직물 공장이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에 세워져서 부드럽고 섬세한 견직물이 생산되었다. 15세기의 피렌체는 모직물의 세계적 생산지로서, 피렌체 상인이 그 당시의 전 세계를 상대로 섬세한 모직물을 팔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전 과정에서 기본이 된 것은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질서였으며, 이를 위하여 교육과 윤리 면에서 중세와 다른 규범이 필요해졌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 휴머니즘의 등장이다.

 

 과거에 없었던 휴머니즘은 천재의 개성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으므로 지오토, 보티첼리, 레오나르드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있은 신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감정을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고전 부흥의 정신을 발휘하여 제작된 르네상스의 대리석 건물이나 청동 조각상은 당대의 미의식과 개인 존중의 관념이 표현되어 있으며, 전신상은 인체미에 대한 숨김없는 찬미를 나타내고 있다.

 

 고전주의와 휴머니즘에 의한 세속적인 관심은 미술 분야에 초상화의 장르를 확립하게 하였는데, 화가들이 후원자의 요청에 따라서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 하였다. 인물 묘사에서 화가들이 의상과 직물 디자인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이탈리아의 화가 페셀리노, 폴라이우올로, 자코포, 벨리니 등은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 등지로 확산되었고, 종교적으로 억압된 통제에서 빚어진 의복의 획일성에서 벗어나서 나라마다 스타일과 장식 디자인에서 특성이 생겨났다. 14세기 말에 프랑스가 최신 모드의 옷을 입힌 인형을 영국 왕실에 선물한 기록이 있고, 베네치아의 패션 리더들이 프랑스로부터 패션 인형을 수입하여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부유해진 도시인들은 현실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매우 향락적인 생활을 추구하였으므로 의복도 이러한 사조의 영향을 받아 정교하고 사치해졌다. 귀족들은 가문을 나타내고 과시하기 위해 의복 전체에 수를 놓아 장식하거나 담비털을 과도하게 사용하였으며, 1428년에 영국에서는 원뿔형 모자인 헤닌의 높이가 지위를 나타냈으므로 1미터까지 높아지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복식에 관한 규제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사치금지령은 14세기에 영국에서 국가법으로 제정되었다. 1355년에 외국에서 옷감을 수입해 오지 못하게 하는 법과 담비털을 사용금지법을 시행하면서 조사, 단속까지 하였고 1363년에 기사 계급 이하와 일정 수준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는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어떠한 것도 입을 수 없고, 실크나 수놓은 옷감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금지령은 복식사에서 대부분의 경우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로 남아 있다.

 

14세기 복식의 일반적 특징

 14세기 복식의 특징은 문장복과 부분적으로 색이 다른 옷(particolored costume)이 유행한 것이다. 지금까지 유사하던 남녀 복장에 뚜렷한 차이가 생겨난 것이나 단추를 의복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기 중기에 의복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길(bodice)과 스커트를 각각 다른 색으로 만들고 스커트에 주름을 잡아 허리선에서 길에 연결시킨 의복이 나왔다.

 

 문장복의 발달은 애초에 기사들이 갑옷 위에 쉬르코를 입으면서 앞가슴 부분에 문장을 달았으며, 방패에도 문장을 새기고, 방패를 쓰지 않을 때는 문장이 있는 덮개를 하여 두었는데 이러한 것이 문장복의 시작이 되었다.

 

 문장의 디자인은 건축물, 가구, 실내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었고, 문장의 모든 선이나 모양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해설하는 문장학이란 학문까지 나왔다.

 

 이러한 문장 디자인의 사용은 기사들이 마상 시합에서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가리므로 기사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색과 문장을 가문에 따라 다르게 한 데서 구별의 표시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문장복에 대한 다른 견해는 십자군 원정 때 부인들은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자수로 세월을 보냈으므로 자수법이 발달하였고, 전쟁 후에 귀족 부인들이 일반 평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방편으로 그들의 의복에 자기 가문의 문장을 수놓게 된 데서 문장복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 가문의 문장을 옷의 오른편에, 친정 가문의 문장은 왼편에 수놓았다고 한다.

 

 문장 도안 내용은 새, 물고기, 뒷발로 서 있는 사자, 표범 등 매우 다양하며, 이러한 문장을 새긴 옷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으므로 널리 유행하였다.

 

 복식사상 또 다른 흥미 있는 의복은 부분적으로 색이 다른 옷이다. 14세기에 이상하고 기상천외한 옷을 고안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귀족 사회의 계급 방어 의식이 자기 가문의 특징을 나타내려고 하였고, 귀족 집안의 하인들에게 가문을 나타내는 제복을 입도록 한 데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부분적으로 색이 다른 옷과 양말, 모자 등이 오늘날 광대(clown)의 복식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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